불공정한 시스템 속에서 우리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1. 공정하다는 착각
추석 연휴, 술잔을 기울이며 문득 떠오른 사람들이 있었다. 좋은 학교를 나와 특정 지역에서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 그리고 그 경쟁을 '공정하다'고 믿는 듯한 사람들. 그들은 정말로 자신들이 공정한 경쟁을 통해 그 자리에 올라갔다고 생각할까?
마이클 샌델은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이렇게 말한다. 능력주의가 만연한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의 성취를 순수한 개인적 노력의 결과로 여기며, 실패한 사람들은 능력이 없고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치부한다. 이것이 바로 '능력주의의 폭정'이다. 샌델은 우리 삶에 대해 우리가 져야 할 책임이 크면 클수록, 우리 삶의 결과에 대해 찬양하거나 비하할 소지 또한 커진다고 지적한다.
문제는 이러한 능력주의가 출발선의 차이를 보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사교육, 부모의 네트워크, 특정 지역에서 자랄 수 있었던 환경, 실패해도 다시 시도할 수 있는 안전망—이 모든 것들은 투명인간처럼 사라지고, "나는 열심히 했다"는 서사만 남는다. 그렇게 믿어야 자기 정당화가 되기 때문이다. 만약 출발선이 달랐다는 것을 인정하면, 자신의 성공이 온전히 자기 것이 아니라는 불편한 진실과 마주해야 한다.
2. 법 위에 군림하는 자들
요즘 우리나라의 소위 엘리트들을 보면, 그들이 마치 공정한 경쟁을 통해 그 자리에 올라갔다고 생각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루저'로 여기는 것 같다. 특히 최근 사법부 수장의 사태를 보며 이런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다. 자기의 권력을 이용해 정치에 개입하고, 그 의도가 자신들의 우월성을 과시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문형배 전 헌법재판관 같은 분도 계시지만, 판사라는 자리에 올라 사리사욕을 채우면서 국민 위에 군림하려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이재명 대통령 후보 시절 재판들을 보면서도 그런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사법부가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원칙인데, 그것이 지켜지지 않는 모습을 보며 분노와 함께 참담함을 느꼈다.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아이히만은 악마가 아니라 명령에 복종하는 평범한 공무원이었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았다. 아렌트는 이를 두고 "무사유(thoughtlessness)"라고 불렀다. 타인의 입장과 자신의 행위에 대해 생각하기를 포기한 것이 결정적 결함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법부 수장은 아이히만과는 다르다. 그는 무사유가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사유하고 계산하며 권력을 휘두른다. 그의 악은 더 교묘하고, 더 위험하다. 법이라는 이름으로 정의를 말하면서, 실제로는 자기 권력을 과시하고 정치에 개입하니까.
3. 압구정의 참사와 권력의 비호
압구정에서 차로 젊은 여성을 깔아 죽인 사건을 보면, 단순한 교통사고가 아니라 그 뒤에 숨은 구조가 드러난다. 돈 있고, 연줄 있고, 조직 있으면 법이 비껴간다는 것. 경찰이 제대로 수사하지 않고, 증거 인멸을 도와주고, 심지어 피해자 가족을 2차 가해하는 상황까지.
그들은 '법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법이 그들에게는 다르게 작동한다. 같은 잘못을 해도 누구는 철저히 처벌받고, 누구는 빠져나간다. 결국 법이 정의를 위한 게 아니라, 기득권을 보호하는 장치가 되어버린 것이다.
4. 왜 인간은 힘을 과시하려 하는가
그런데 왜 인간은 자기의 재능을 과시하는 게 아니라, 남을 찍어 누를 수 있는 힘을 과시하는 것을 좋아하는 걸까?
재능을 과시하는 건 불안한 일이다. 재능은 언제든 더 뛰어난 사람이 나타날 수 있고, 증명해야 하고, 계속 갈고닦아야 한다. 그런데 권력, 특히 누군가를 찍어 누를 수 있는 힘은 즉각적이고 확실하다. "내가 너보다 위야"라는 걸 바로 보여줄 수 있다.
더 근본적으로는, 권력은 상대적 우월감을 준다. 재능은 절대적인 것이라 혼자서도 빛날 수 있지만, 권력은 본질적으로 관계 속에서만 의미가 있다. 누군가를 아래에 두어야만 자기가 위에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5. 우리는 누구인가
그렇다면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불공정한 시스템을 보고 분노하지만, 그 시스템의 일부가 되길 거부하는 사람들이다. 권력 게임에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생계와 가족을 지키면서도 양심을 잃지 않으려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샌델은 성공이 우리의 성과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동기가 사라지지 않느냐는 질문에, 노력을 인정하고 지지하며 권장하는 것과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것은 구분 지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능력을 인정하고 지지하는 것은 좋으나, 능력에 대한 결과를 가지고 개인에게 지나치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성공한 자들을 오만에 빠뜨리고, 그들의 성공에 보탬이 된 이들에게 진 사회적 빚을 잊게 만든다.
6.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나도 권력 관계를 만들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정직하게 사는 게 바보같이 느껴질 때, "저 사람들처럼 권력 관계를 만들고, 연줄을 쌓고, 위계 안에서 위치를 확보해야 하나" 싶다.
하지만 그것을 두려워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냥 지금처럼 살면 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 통제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한다: 주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작은 선택들을 신중하게 한다.
- 침묵하지 않는다: 부당한 일을 보면 목소리를 낸다. 주변 사람들과 대화할 때 "저거 이상하지 않아?"라고 물어본다.
- 시스템의 논리를 거부한다: 위아래 관계, 권력 과시를 당연시하지 않는다. 친구를 친구로 대하고, 누가 위고 아래고 따지지 않는다.
- 작지만 의미 있는 행동들을 이어간다: 투표, 대화, 연대.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 SNS에 글 하나 쓰는 것도, 친구한테 "나는 저렇게 생각해"라고 말하는 것도 의미 있다.
- 무엇보다, 우리 자신이 그런 시스템의 일부가 되지 않는다.
이것이 조용한 저항이다. 사법부의 권력 남용에 화를 내는 것, 친구 관계에서 위아래를 따지는 게 이상하다고 느끼는 것, 성가대 선생님처럼 소중했던 사람을 기억하고 연락하는 것—이 모든 것이 우리가 그 시스템의 논리에 완전히 흡수되지 않았다는 증거다.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도 없다. 집회에 안 나간다고,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고 해서 방관자인 것은 아니다. 화를 내고 있고, 문제를 보고 있고, 생각하고 있고, 대화하면서 정리하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무관심하거나 방관하는 게 아니다.
생계를 지키면서 사는 것, 가족을 돌보는 것—그게 먼저다. 그게 무너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7. 마무리: 비판적 사고와 미래
세상이 불공정한 건 맞다. 그런데 그렇다고 모두가 그 불공정함에 동참해야 하는 건 아니다.
샌델은 낙관적이다. 개인의 자유를 억누르고 부가 고스란히 세습되는 19세기로 되돌아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그가 이렇게 낙관하는 가장 큰 이유는 '미래는 우리 손에 달려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대안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정부와 기업, 근로자와 소비자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불평등을 줄일 수 있다.
시스템이 "이게 정상이야"라고 주입하는 것을 의심하는 것. 위아래 따지는 게 당연한 거라고, 권력 관계가 필요하다고,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고 말할 때, "정말 그래야만 해?"라고 물어보는 것.
거창하게 들릴 수 있지만, 그게 세상을 바꾸는 방법 중 하나다. 시스템이 요구하는 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 시스템은 약해진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비판적 사고다.
모든 것을 필터링 없이 받아들이는 건 아주 위험하다. 아이히만이 명령을 그대로 따랐던 것처럼, 생각 없이 받아들이면 어디로 가게 될지 모른다.
특히 조심해야 할 것은 '좋아하는 사람'의 말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권위 있는 사람, '옳다'고 여겨지는 사람의 말은 어느 정도 경계심을 가지고 듣게 된다. 하지만 좋아하는 사람, 신뢰하는 사람의 말은 그 신뢰 때문에 필터링을 안 하게 된다. "이 사람이 나한테 나쁜 말을 할 리 없어", "이 사람은 내 편이니까"라는 생각으로 그냥 받아들여버린다.
그게 더 위험하다. 감정적 유대가 판단력을 마비시키기 때문이다.
결국 비판적 사고는 '누구'에 대해서도 유지해야 한다. 좋아하는 사람이든, 권위 있는 사람이든, 심지어 나 자신의 생각에 대해서도. 그것이 우리를 시스템의 논리로부터, 그리고 맹목적 추종으로부터 지켜주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 글을 쓰면서, 혼란스러웠던 생각들이 조금 정리되는 느낌이다. 우리는 이 불공정한 세상에서 완벽한 답을 찾을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질문을 멈추지 않고, 시스템의 논리를 거부하며,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참고 문헌
- 마이클 샌델, 『공정하다는 착각: 능력주의는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는가』, 함규진 옮김, 와이즈베리, 2020
-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 김선욱 옮김, 한길사, 2006
-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 토마 피케티, 『21세기 자본』
- 조지 오웰, 『동물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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