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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량문명으로의 참여 : 불안사회를 지나 내 삶의 가치를 찾아서

Tiboong 2025. 10. 22.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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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우리는 왜 불안한가

 

"사회가 불안해서 개인이 불안한 걸까, 개인이 불안해서 사회가 불안한 걸까?"

이 질문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비슷해 보이지만, 사실 우리 시대의 본질을 꿰뚫는다. 답은 단순하지 않다. 불안은 개인과 사회 사이를 순환하며 증폭된다. 경제 불안정은 개인의 생존 불안을 만들고, 불안한 개인들은 다시 과잉 경쟁 사회를 강화한다. 이 악순환 속에서 우리는 묻는다. 이 고리를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

성과사회라는 함정

한병철은 『피로사회』에서 현대사회를 날카롭게 진단했다. 우리는 더 이상 외부의 강제에 의해 억압받지 않는다. 대신 "할 수 있다"는 긍정성의 명령 아래 스스로를 착취한다. 과거 규율사회가 "~하면 안 된다"고 금지했다면, 현재 성과사회는 "~할 수 있다"고 부추긴다.

이것이 더 교묘한 이유는 명확하다. 우리는 자유롭다고 느끼면서 스스로를 한계까지 몰아붙인다. 자기계발, 끊임없는 성과, 더 나은 자신 되기. 이 긍정성의 과잉은 결국 피로와 우울로 귀결된다. 가장 잔인한 것은 우리가 가해자이자 피해자라는 사실이다. 실패했을 때 우리는 시스템이 아닌 자기 자신을 탓한다.

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샌델이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폭로한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신자유주의는 우리에게 능력주의라는 신화를 팔았다. "기회는 평등하다.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 성공한 사람은 능력 있는 사람이고, 실패한 사람은 노력하지 않은 사람이다."

하지만 이것은 착각이다. 출발선은 결코 같지 않다. 부모의 소득, 교육 수준, 거주 지역, 심지어 운까지. 당신의 능력은 순수하게 당신만의 것이 아니다. 좋은 유전자, 안정적 가정환경, 질 높은 교육, 사회 인프라, 시장 타이밍. "나 혼자 이룬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능력주의를 믿는다. 왜냐하면 이것이 가장 잔인한 불평등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신분제 때문에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었다. 분노할 대상이 명확했다. 하지만 지금은 "나는 능력이 없어서 실패했다"고 자신을 탓한다. 이것이 자존감을 붕괴시키고, 수치심을 내면화하며, 우울을 만든다.

세뇌된 뇌

"노력하면 된다",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 "자기계발하지 않으면 도태된다", "집은 사야지, 투자야".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는 자연스러운 진리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1980년대 이후 만들어진 이데올로기다.

시스템은 매일 이 믿음을 강화한다. 학교는 시험과 등수로 우리를 줄 세운다. 미디어는 성공 신화와 자수성가 스토리를 반복한다. 기업은 성과주의와 무한 경쟁을 요구한다. 정치는 "일자리는 만드는 것"이라 말하며 복지를 포퓰리즘으로 치부한다.

매일 이런 메시지를 받으면서 어떻게 안 믿을 수 있겠는가? 더 고통스러운 것은, 우리가 이 게임이 불공정하다고 알아도 당장 내일 먹고살기 위해서는 게임에 참여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인지부조화 속에서 우리는 "억울하지만 어쩔 수 없어"라고 중얼거린다.


2부: 시스템의 균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약속들

신자유주의는 우리에게 약속했다.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 경쟁이 효율을 만든다.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 하지만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불평등은 갈수록 심화된다. 상위 1%가 부를 독점하고, 계층 이동은 점점 더 어려워진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이제 신화가 되었다. 수저론이 등장한 이유다. 청년들은 "N포세대"가 되어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다. 번아웃과 우울증은 일상이 되었고, "탈조선", "퇴사"가 트렌드가 되었다.

사람들은 이상하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열심히 일해도 집은 살 수 없고, 스펙을 쌓아도 좋은 일자리는 부족하며, 끊임없이 자기계발해도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 무언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감각.

변화의 조짐

송길영은 『시대예보』에서 데이터를 통해 변화를 포착했다. 사람들의 검색어, 소비 패턴, 관심사는 달라지고 있었다. 소유에서 경험으로, 성공보다 의미로, 경쟁보다 공존으로, 조직보다 개인으로.

MZ세대는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워라밸", "소확행", "공정"에 대한 집착. 이것은 단순한 세대 특성이 아니다. 기존 시스템에 대한 거부이자, 다른 삶에 대한 갈망이다. 신자유주의가 약속했던 것에 대한 환멸의 증거다.

중량문명의 한계

우리는 중량문명 시대를 살아왔다. 거대 기업, 표준화된 생산, 대량 소비, 승자독식. 이 시스템 안에서 개인은 톱니바퀴였다. 거대 조직에 소속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공장이나 자본 없이는 생산이 불가능했다.

이 중량문명은 효율적이었지만 잔인했다. 개인의 자율성은 억압되었고, 획일화는 다양성을 죽였으며, 경쟁은 공동체를 파괴했다. 그리고 이 시스템은 이제 한계에 도달했다. 불평등은 극에 달했고, 환경은 파괴되었으며, 사람들은 지쳐 쓰러졌다.


3부: 경량문명이라는 가능성

핵개인의 탄생

그런데 무언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AI의 등장이다. 갑자기 개인이 거대 조직 없이도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 과거에는 개발팀 10명, 디자이너 3명, 마케터 2명이 필요했던 일을 이제 1명이 AI와 함께 할 수 있다.

이것은 단순한 효율화가 아니다. 생산수단의 소유권이 개인에게 돌아온다는 의미다. 마르크스가 꿈꿨던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자본주의 기술로 실현되고 있다. 공장과 자본이 필요 없다. AI와 인터넷만 있으면 된다.

이렇게 탄생한 핵개인은 새로운 생산 단위다. 더 이상 거대 조직의 톱니바퀴가 아니다. 스스로 판단하고, 창조하고, 가치를 만든다. 필요할 때만 다른 핵개인들과 연결되어 협업한다. 고정된 조직이 아닌 유동적 네트워크.

경량 소비의 등장

생산이 경량화되면 소비도 달라진다. 대량 소비 문화는 중량문명의 산물이었다. 모두가 같은 것을 소유하고, 과시하고, 축적했다. "많이 가진 자가 승자"였다.

하지만 경량문명에서는 다르다. 소유보다 접근, 과시보다 의미, 표준보다 맞춤, 대량보다 소량 다빈도. 차를 소유하는 대신 카셰어링을 쓰고, CD를 모으는 대신 스트리밍을 듣고, 명품으로 정체성을 증명하는 대신 가치 있는 경험에 투자한다.

핵개인 생산자는 경량 소비자가 된다. 대기업 사무실이 필요 없으니 공간 소비가 줄고, 출퇴근이 없으니 교통 소비가 줄고, 과시할 필요 없으니 명품 소비가 줄고, 작업 자체가 만족이니 보상 소비가 불필요하다. 작은 수입으로도 괜찮은 삶이 가능하다.

생산과 소비의 재구성

중량문명의 경제는 이렇게 작동했다. 대기업이 대량 생산하고, 대량 유통하고, 사람들이 대량 소비하고, 대량 폐기한다. 고용-임금-소비-성장의 순환.

경량문명의 경제는 다르다. 핵개인이 생산하고, 맞춤형으로 소비하고, 순환한다. 창작-의미-지속가능성. 규모를 추구하지 않아도 된다. 고객 100명에게 월 10만원을 받는 구조. 천 명의 진짜 팬. 작지만 의미 있는 경제.

새로운 연대의 형태

경량문명은 개인의 고립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새로운 형태의 연대가 가능해진다. 중량문명의 연대는 수직적이고 고정적이었다. 회사, 노조, 정당. 명확한 위계와 소속.

경량문명의 연대는 수평적이고 유동적이다. 핵개인들이 프로젝트 단위로 모이고 흩어진다. 가치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느슨하게 연결된다. 협동조합, DAO(Decentralized Autonomous Organization, 탈중앙화 자율 조직), 커뮤니티. 고용 관계가 아닌 파트너십. 각자의 독립성을 유지하면서도 필요할 때 함께한다.

이것은 더 인간적인 관계다. 서로를 도구가 아닌 존재로 인정한다. 쓸모가 아닌 가치로 연결된다. 경쟁자가 아닌 동료다.


4부: 실천으로서의 답

개인 삶의 재설계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구조는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개인의 삶은 오늘부터 다르게 설계할 수 있다.

 

첫째, 성과 지표를 재정의하라. 사회가 요구하는 성공 기준을 내면화하지 말라. "나에게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를 스스로 정의하라. 타인과의 비교를 의도적으로 차단하라.

 

둘째, 시간 주권을 되찾아라. 생산성과 무관한 시간을 의식적으로 배치하라.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을 죄책감 없이 가져라. 빈틈과 여백을 삶의 필수 요소로 인정하라.

 

셋째, 관계의 질을 바꿔라. 네트워킹이 아닌 진짜 관계를 맺어라. 서로의 쓸모가 아닌 존재 자체를 인정하는 관계. 취약함을 드러낼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만들어라.

 

넷째, 작은 거부를 실천하라. 모든 기회에 응답하지 말라. "할 수 있지만 하지 않겠다"고 말하라. FOMO(Fear Of Missing Out, 놓칠까봐 하는 불안)에서 벗어나라.

작은 시도들이 만드는 변화

개인이 이렇게 바꾸는 것 자체가 작은 구조 변화를 만들어낸다.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 "이 게임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하면, 게임의 룰 자체가 흔들린다.

누군가는 1인 기업가가 된다. AI로 무장하고 작은 앱을 만들고, 니치 시장을 공략하고, 의미 있는 가치를 창출한다. 크리에이터가 되어 자신의 관점을 나누고, 소규모 커뮤니티를 운영하고, 구독자들과 진짜 관계를 맺는다.

누군가는 협동조합을 만든다. 같은 가치를 추구하는 핵개인들이 모여 공정한 플랫폼을 소유한다. 중간 착취 없이 일한 만큼 나눈다. 경쟁이 아닌 협력으로 작동하는 경제를 실험한다.

누군가는 지역 공동체를 활성화한다. 거대 도시와 대기업이 아닌, 작은 마을에서 작은 가게를 운영한다. 이웃과 관계를 맺고, 로컬 경제를 만들고, 지속가능한 삶을 실천한다.

이 모든 시도는 작아 보이지만 의미가 있다. 중량문명의 균열을 만들고, 대안의 가능성을 보여주며, 다른 사람들에게 영감을 준다.

경량문명의 참여자가 되는 법

경량문명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 그것은 단순히 AI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가치로, 어떤 구조로 사용하느냐가 중요하다.

같은 기술로 두 가지 미래가 가능하다. 하나는 낙관적 시나리오다. 개인이 AI로 무장하고 독립한다. 거대 기업의 횡포에서 벗어난다. 더 평등한 기회 구조가 만들어진다. 연대하는 핵개인들의 네트워크가 형성된다.

다른 하나는 비관적 시나리오다. 개인이 더 철저히 원자화된다. 모두가 1인 기업가가 되어 모두가 경쟁자가 된다. 안전망은 더욱 약화되고 고용 관계가 소멸한다. 플랫폼 기업만 배불린다. "네가 못사는 건 AI도 못 쓰는 무능 때문"이라는 새로운 능력주의가 등장한다.

우리는 지금 이 갈림길에 서 있다. 어느 쪽으로 갈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렸다.

경량문명의 참여자가 된다는 것은 이런 의미다. 단순히 개인으로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구조를 만드는 데 기여하는 것. 혼자가 아닌 함께. 경쟁이 아닌 협력. 착취가 아닌 공정함. 효율이 아닌 의미.

구체적으로는 이런 것들이다. 당신이 무언가를 만든다면, 중량문명의 논리가 아닌 경량문명의 가능성으로 만들어라. 당신이 협력자를 찾는다면, 고용이 아닌 파트너십으로 관계를 맺어라. 당신이 수익을 내다면, 독점이 아닌 공유로 분배하라. 당신이 소비한다면, 과시가 아닌 가치로 선택하라.

작은 실천들이 모이면 문화가 되고, 문화가 모이면 구조가 된다. 우리는 이미 시작했다. 경량문명은 먼 미래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싹트고 있다.


결론: 우리는 경량문명의 참여자로서 답을 찾아가야 한다

"개인이 어떻게 불안한 시스템에서 벗어나 의미 있는 삶을 살고, 더 나은 구조를 만들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하나가 아니다. 정해진 청사진도 없다. 하지만 방향은 명확하다. 중량문명의 논리를 넘어서, 경량문명의 가능성으로 나아가는 것.

불안사회는 우리를 지치게 했다. 신자유주의는 우리를 속였다. 능력주의는 우리를 짓눌렀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수동적 피해자가 아니다. 우리는 능동적 참여자가 될 수 있다.

AI는 도구다. 그것을 어떻게 쓰느냐는 우리에게 달렸다. 더 가혹한 착취의 도구로 쓸 수도 있고, 해방의 가능성으로 쓸 수도 있다.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경량문명은 유토피아가 아니다. 완벽한 해답도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시도할 가치가 있는 실험이다. 불안사회를 지나, 내 삶의 가치를 찾아가는 여정. 혼자가 아닌 함께, 경쟁이 아닌 연대로.

우리는 이미 길 위에 있다. 누군가는 1인 기업가로, 누군가는 크리에이터로, 누군가는 협동조합원으로, 누군가는 지역 활동가로. 각자의 방식으로 경량문명에 참여하고 있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그 중 한 명이다. 당신이 오늘 내리는 작은 선택들, 당신이 거부하는 것들, 당신이 만들어가는 관계들, 그 모든 것이 경량문명을 만들어간다.

불안사회는 끝나지 않았다. 신자유주의는 여전히 강력하다. 하지만 균열은 생겼고, 가능성은 열렸다. 이제 우리가 답을 찾아갈 차례다.

경량문명으로의 참여. 그것은 명령이 아니라 초대다. 의무가 아니라 가능성이다. 완성이 아니라 과정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마침내 우리 삶의 가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025년, 불안사회 한가운데서 우리는 경량문명의 참여자로서 답을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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