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가불린 (Lagavulin).
이름의 의미는 '방앗간 옆 진창'이라는 뜻이란다.
위스키는 다 비슷한 맛인 줄 알았다. 모두 같은 맛이 아니라 비슷한 맛. 집에는 주로 블랜디드 위스키가 있었다. 발렌타인, 시바스 리갈, 조니워커, 캐나디안 클럽, 산토리 등등. 아버지가 여행사 인바운드 영업이셔서 일본 출장이 잦으셨기 때문인지 아버지는 위스키 창고가 있었다. 커다란 철제 캐비닛 안에는 아버지의 온갖 잡동사니가 들어있었고 캐비닛 밑칸은 거의 전부 술 이었다. 아버지는 주로 꼬냑을 좋아하셨다.
처음 마셔본 피트 위스키는 충격이었다.
'이게 뭐엿!!!'
글렌 터렛이라는... 싱글몰트에 자주 쓰이는 '글렌'이 붙은 위스키임에도 불구하고 병 뚜껑을 개봉했을 때, 마치 종합병원 수술방을 연상시키는 알콜 냄새는 나를 충격에 빠뜨렸다. 결국 그 한병을 다 비우는데는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피트(FEAT)라는 단어는 얼른 머리 속에서 지워야 했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신동엽님이 '라가불린'을 좋아하신단다. 큰일났다. 호기심이 생겼다. 그때 부터 몇달간 '라가불린'이 머리 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동네 주류상에 '라가불린 8년'이 할인 가격에 판매 되었을 때, 더 이상은 버틸 수 없었다. 그 옆에 쟁쟁한 경쟁상대들이 있었지만 나는 라가불린을 집에 데려올 수 밖에 없었다.
심지어 박스 포장에 잔까지... 라벨과 가격과 박스 포장에 비해 날씬하게 쭉 뻗은 바디와 초록색 외관은 우중충한 스코틀랜드의 어느 바닷가 증류소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힘줄이 튀어나온 팔뚝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이렇게 묻고 있는 듯 했다.
'너... 나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나?'
두려움과 흥분과 기대로 열어본 라가불린 8년은 정말 신세계였다.
"중구형 이거 너무한거 아니? 어?!!!'
첫 향은 피트 향이 코를 쏘옥~! 찌른다. 같은 피트 향이지만 글렌터렛의 그것과는 다르다. 글렌터렛이 전장(戰場)의 야전 병원 수술방의 알콜 냄새라면 라가불린의 피트향은 어느 고오급 개인 병원의 VIP 전용 수술방의 알콜냄새 같았다. 뭔가 부드럽고 달콤한 향이 나는데 그 안에 고운 사포와 같이 거칠은 것이 코 속에 들어와 '콕!' 찌른다.
입안에 넣었을 때는 특유의 피트향이 입안을 머물다 코를 통해 밖으로 나가려 맹렬히 경로를 찾으려 하고 목으로 넘어갈 때는 부드럽게 피니쉬가 입안에 가득 퍼지며 코와 입으로 꿀 같은 알콜 향이 뿜어져 나온다. 그리고 그렇게 아일라(Islay) 증류소의 매력에 한발짝 다가서게 되었다. 멋지다... 스코틀랜드 싱글몰트는 하이랜더의 크리스토퍼 램버트를 상상하게 만들었는데 어떻게 같은 땅에서 나온 다른 증류소의 위스키는 또 다른 매력을 뿜어내는 것일까?
당장이라도 아일라 섬에 가서 그 비밀을 풀어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생긴다.
정말 못 마시고, 못 마시고, 못 마시겠어서 억지로 목구멍으로 넘긴게 글렌터렛 10년 피트 스모크드라면 정말
아깝고, 아깝고, 아까워서 아껴마신게 라가불린 8년이었다.
그 뒤에 아드벡과 라프로익도 마셔봤다. 만약 누군가에게 피트위스키를 권한다면 나는 꼭 '라가불린'으로 시작해보라고 권해주고 싶다. 위스키의 새로운 매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그 뒤에 기회가 생겨 16년도 접해 볼 수 있었는데 16년은 정말 고오오오오급 피트 위스키이고 지극히 주관적인 술에 대한 의견을 말한다면 남성적 매력과 목젖을 때리는 임팩트를 원하면서도 목 넘김에 거부감이 없는 술은 라가불린 8년이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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