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글을 써 봅니다

toast out

Tiboong 2024. 7. 17.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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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짝 데인 것 뿐이니 부디 절망하지 않기를...

 

비가 많이 온다. 장마철이라고 한 지가 좀 됐는데 그동안 오락가락하더니 오늘은 아침부터 장대비가 쏟아진다. 잠시 누그러졌다가 쏟아졌다가를 반복하는 것 같다. 오전에 일찍 일어나 강아지와 산택을 가려다가 내리는 부슬비에 다시 들어왔다. 그때가 잠시 쉬고 있는 시간이었나 보다. 지난달에 프리랜서로 합류했던 프로젝트에서 중도 하차한 이후 집에서의 루틴이 생겼다. 6시~6시 반 기상 후 강아지와 산책. 아침을 간단히 먹고 블로그를 관리한다. 오전에는 글 쓰는 연습을 하고 오후에는 개인 프로젝트와 프리랜서 구인 공고를 보고 괜찮은 프로젝트가 있으면 지원하고 한다. 아무래도 나이가 많고 이력서가 일관되지 않아서인지 인터뷰를 요청하는 곳은 없다. 급한 거, 안 되는 거, 누군가 하다 도망간 프로젝트 땜빵하는 게 전문인데 그런 걸 자기소개에 녹여내기란 쉽지가 않다.

 

오늘도 변함없이 아침 루틴 중이었는데 큰 딸아이가 묻는다.

'오늘 학교 데려다주면 안 됨?'

딱히 급한 일도 없고 차를 움직인지도 좀 돼서 흔쾌히 데려다 주마했다. 큰 아이의 학교는 집에서 두 블록 정도 떨어져 있다. 맑은 날 걸어가면 10분 정도 걸리겠다. 오늘은 비도 많이 오고 그러니 걸어가는 걸 상상만 해도 짜증이 났으리라. 녀석은 올해 고3이다.

녀석은 어제 대학 진학 문제로 이야기를 나누다 결국 방에 들어가 울었단다. 직접 보진 못 했지만 아내가 방에 살짝 들어갔다 나와서는 검지와 중지로 자기 양쪽 눈 밑을 쓸어내리는 시늉을 했다. '날도 덥고 그래서 좀 지쳤나 보다... 피하고 싶고 도망치고 싶고 포기하고 싶겠지...' 이러저러한 해주고 싶은 말이 생길 때마다 속으로 꾹꾹 눌러 담는다. 도와준다고 한 말이 상대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아이를 태우고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올 때쯤 라디오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 '토스트 아웃(toast out)'. 무슨 말일까? 처음 들어보는데... 아마도 모 라디오 방송의 영어 알려주는 코너였던 것 같다. 전부다 기억이 나진 않았지만 '번 아웃(Burn out)' 보다는 작은 의미로 좀 지쳤다는 말이란다. 직장인들에게 많이 쓰인단다. 번 아웃이 하얗게 불태운 거라면 토스트 아웃은 살짝 데인 정도란다. 그래... 맨날 번 아웃 되면 정신이 남아나겠나. 몽땅 하얗게 불태워 버려서 더 태울 것도 없어지면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겠나. 꽤 괜찮은 표현이라며 나중에 어느 술자리에 가면 써먹어야겠다고 머릿속에 저장했다.

 

아이를 학교 근처에 내려주고 돌아오고 있었다. 아파트 단지에 들어가기 위해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직 직진 신호가 바뀌지도 않았는데 우산도 받쳐 쓰지 않은 청년 하나가 횡단보도를 건넌다. 청년이 뛰어드는 바람에 놀란 차들이 급하게 속도를 줄였다. 청년은 거푸 미안하다는 표시로 한 손을 들고 허리를 숙였다. 횡단보도 양쪽에는 출근과 등교를 하려고 기다리고 있는 직장인과 학생들이 모여있었고 학교 근처라서 교통 봉사 해주시는 어른들이 노란 깃발로 지금 건널 수 없다는 표시를 하고 있었다. '뭐야...?' 청년의 진행방향을 따라 백미러를 들여다보니 뒤쪽 버스 정류장에 버스 한 대가 서 있다. '아... 저 버스를 타야 되나 보다. 저 버스 자주 안 오는데...' 청년이 급하게 올라탄 버스는 운행 거리가 길고 배차 간격이 넓어서 20분에 한 대 정도 오는 버스다. 출퇴근 시간이 지나면 거의 30분에 한 대 정도 온다. 요즘엔 버스 앱도 잘 되어있어서 미리 여유 있게 나와서 기다려도 됐을 텐데. 저러다 혹시나 사고가 나면 어쩌려고. 비도 오고 날도 어둑어둑해서 운전하는 사람들도 시야확보가 잘 안 될 텐데. 짧은 시간에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내렸다 한다.

 

내가 그 청년의 입장이라면 어땠을까? 어제 회식 때문에 술을 좀 마셨고 그 때문에 아침에 배탈이 났고 그래서 평소보다 늦게 나와서 안 그래도 지각인데 버스는 정류장에 섰고 신호는 안 바뀌고, 목숨 걸고 달려오는 차를 세워 길을 건너 버스를 탔는데 사람은 많고 다른 사람 백팩에 묻은 빗 물에 셔츠는 다 젖었고. '하아...' 하는 한숨과 함께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가지 않을까? '회사 가지 말까?', '연차 쓸까? 아니면 반차라도 쓸까?' 그러다가는 점점 회사에 가까워지는 버스 안에서 체념하고 말지 않을까? 이런 것도 토스트 아웃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마도 이런 것들은 사소한 것들에 포함되리라.

 

내 아이도 그렇고 그 청년도 그렇고 부디 토스트 아웃 정도에서 다시 회복되기를 바란다. 살짝 그을린 토스트에는 버터도 바르고 잼도 바르고 햄도 끼워 넣어 맛있는 샌드위치를 만들 수 있지만 바짝 타버린 토스트는 어떻게 해도 그 쓴 맛을 없앨 수 없기에. 그리고 부디 자기 자신을 귀하게 생각하기를... 우린 아직 열어보지 않은 문이 많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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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ast out

살짝 데인 것 뿐이니 부디 절망하지 않기를... | 비가 많이 온다. 장마철이라고 한 지가 좀 됐는데 그동안 오락가락하더니 오늘은 아침부터 장대비가 쏟아진다. 잠시 누그러졌다가 쏟아졌다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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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지만 처음 글 쓰는 사이트에 올려본 첫 번째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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