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렌은 항상 돈이 없다.
천년을 살았고, 마왕을 잡은 용사 파티의 일원이었으며, 대륙에서 손꼽히는 마법사인데도 여비가 늘 모자란다. 경유하는 모든 마을의 마법 상점에서 마법 도구나 마도서를 사 모으기 때문이다.
옷을 깨끗하게 해주는 마법, 꽃밭을 만드는 마법, 동상을 녹이는 마법. 누가 봐도 쓸모없는 것들이다. 마왕을 잡으려면 화력이 필요하지, 꽃밭이 무슨 소용이겠나.
그런데도 프리렌은 마법 상점 앞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여비가 모자라질 걸 알면서도.
2000년, 밀레니엄이라는 단어가 희망처럼 느껴지던 해였다.
97년에 첫 입사를 하고 3년쯤 지났을 때다. 월급이 너무 적었다. 그러다 누군가의 도움으로 돈을 좀 벌게 되었는데, 그 돈으로 내가 산 건 모토로라 스타텍이 아니었다. 69만원짜리 Compaq iPaq이었다. PDA.
주변에서 다들 비웃었다. 그거 어디다 쓰냐고. 맞는 말이었다. 데이터 요금이란 것 자체가 없던 시절이니까. 인터넷이 안 되는 손 안의 컴퓨터. 쓸모가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 매일 들고 다녔다. 만지작거리면서 이걸로 뭘 만들 수 있을까 궁리했고, 책을 찾았고, 코드를 짜봤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한테 이런 말을 했다. 앞으로는 PDA에 휴대전화 기능이 들어가든지, 휴대전화에 PDA 기능이 들어가서 인터넷이 연결될 거라고.
다들 웃었다.
그 사이에도 멈추지 않았다. WinCE 기반 PDA폰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하면 삼성 옴니아, 옴니아2, Mitz — 나올 때마다 샀다. 마법 상점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으니까.
7년 뒤, iPhone이 나왔다.
그 뒤로 평범한 휴대폰은 쓰지 않았던 것 같다. iPod이 나오면 iPod을 샀고, 한국에 iPhone 3GS가 들어오면 바꿨다. 돈이 넉넉해서가 아니었다. 그냥, 거기에 마법이 있었으니까.
어느 날, 매형 친구가 게임회사를 차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서버를 만들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만나서 면접을 보러 갔는데 제시한 급여가 너무 적었다. 안 할 생각이었는데 너무 궁금해졌다. 게임서버, 어떻게 만드는 걸까?
한번 배워보자, 하고 들어갔다.
그 뒤로 이런저런 게임 회사를 거쳤다. 게임 출시를 위해 일본 출장도 가보았고, 모바일 게임도 만들어서 여러 번 출시해보았다.
블록체인이 너무 배우고 싶어서 연봉을 깎고 입사한 적도 있다. 심지어 평사원으로. 경력이 십수 년인데 평사원이라니, 남들이 보면 바보 같았을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거기엔 내가 모르는 마법이 있었다. 연봉도 줄고, 직급도 줄었지만 — 새로운 마법의 유혹은 나에겐 너무 강력했다.
프리렌이 그랬으니까. 뭐, 프리렌을 그때는 몰랐지만.
프리렌의 스승의 스승인 제리에는 이런 말을 했다.
"상상력이 없는 마법사는 발전이 없다."
같은 마법이라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결과는 완전히 달라진다. 프리렌이 마왕을 이길 수 있었던 건 더 강한 마법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다. 같은 마법을 다르게 쓸 줄 알았기 때문이다.
개발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Python을 아는 개발자는 많다. 하지만 일상의 불편함을 보면서 "이거 자동화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떠올리는 개발자는 그리 많지 않다. 기술을 배우는 것은 마법을 사는 것이다. 그 마법을 어디에 쓸지 상상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능력이다.
상상력이 없으면 개발할 수 없고, 돈을 아끼면 새로운 걸 배울 수 없다.
iPaq을 매일 만지작거리며 미래를 그려본 것도, 급여가 적은 줄 알면서 게임 서버의 세계에 뛰어든 것도, 연봉을 깎고 블록체인 회사에 평사원으로 들어간 것도 — 돌이켜 보면 전부 상상이 시킨 일이었다.
그 상상들이 없었으면, 나는 28년이 지난 지금도 개발을 하고 있지 못 했을 것이다.
"회사에서 교육을 안 시켜줘서 못 배웠다"는 말을 가끔 듣는다.
이해한다. 회사가 성장 환경을 만들어주면 당연히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것만을 기다리는 건, 파티에서 임무를 줄 때만 마법을 익히는 마법사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파티가 해산되면, 회사를 나오면 — 그때 손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프리렌은 왕성한 호기심 때문에 새로운 마법과 마법 도구를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여비가 부족해지는 건 상관없었다. 약간 ADHD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리고 그 쓸데없어 보이던 마법들을 여정의 중간중간 제법 재밌게 써먹었다.
당신의 여비는 부족한가.
그렇다면, 한 가지 체크해 보자.
중요한 건 여비가 부족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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