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 한 친구가 이런 코멘트를 달았다.
특정 회사가 아닌,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주식회사의 의사결정 구조, 대주주의 의사결정 권한의 해석, 한국의 경우 폐해가 좀 더 심하지만, 전반적인 고민을 더 해보는 걸 추천함. 그럼 좋아요가 더 많을 듯.
나는 이 말을 방어하지 않기로 했다. 토론에 약한 사람은 대개 반박할 거리부터 찾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친구의 말이 옳았기 때문이다. 한 회사를 손가락질하는 것으로 끝내면 그건 그저 한 회사의 험담이지만, 그 회사가 딛고 선 구조를 들여다보면 그건 비로소 이야기가 된다. 그래서 받기로 했다. 그럼 그것도 써 보지.
지난 글이 흩어진 감정을 한 줄로 꿰어 보려는 시도였다면, 이번 글은 흩어진 제도를 한 줄로 꿰어 보려는 시도다. 다만 이번엔 따뜻하게 쓰지 않을 작정이다. 구조를 해부하는 일에는 온기보다 날이 필요하니까. 주식회사라는 물건의 배를 갈라, 권한과 책임이 어느 지점에서 갈라서는지를 따라가 보겠다.
책임을 나누려고 만든 물건
먼저 분명히 해 둘 것이 있다. 주식회사는 인류가 만든 가장 영리한 발명품 가운데 하나다. 이 말에 비꼼은 없다.
옛날에 큰일을 벌이려면 한 사람이 전 재산을 걸어야 했다. 배가 가라앉으면 집안이 망했고, 그러니 아무도 큰 위험을 감당하려 들지 않았다. 주식회사는 이 문제를 둘로 쪼개어 풀었다. 돈을 대는 사람과 회사를 굴리는 사람을 나누고, 돈을 댄 사람은 자기가 댄 만큼만 책임지게 한 것이다. 천 명이 조금씩 나눠 대면 한 사람이 망하지 않고도 거대한 배를 띄울 수 있다. 위험을 잘게 나눠 여럿이 나눠 지는 것, 이것이 주식회사의 심장이다.
그래서 주식회사에는 두 개의 자리가 있다. 돈을 댄 주인의 자리, 그리고 그 돈으로 회사를 운영하는 경영의 자리. 주주는 소유하고 이사는 경영하며, 주주는 자기 몫만큼 위험을 지고 경영진은 자기 판단에 책임을 진다. 권한과 책임이 각자의 몫에 맞게 나뉘어 있다는 것, 이 분배가 주식회사를 굴러가게 하는 균형이다.
그 균형을 떠받치는 가장 오래된 약속이 한 주에 한 표, 곧 1주 1의결권이다. 한국 상법은 이를 강행규정으로 못 박아 두었는데, 정관으로도 주주총회 결의로도 함부로 바꿀 수 없다는 뜻이다. 원리는 단순하다. 돈을 댄 만큼 말한다. 만 원을 댄 사람보다 백만 원을 댄 사람이 더 크게 말하는 게 공평하다는 것이다. 더 많이 거는 사람이 더 많이 잃을 테니, 더 크게 말할 자격도 그만큼 생긴다. 권한이 책임을 따라가는 구조, 이것이 비례의 약속이다.
여기까지가 정상적인 도구의 모습이다. 도구에는 죄가 없다. 문제는 늘 용도에서 시작된다.
8.8퍼센트가 74퍼센트를 쥘 때
비례의 약속을 끊어내는 장치가 있다. 차등의결권이다.
쿠팡의 모회사인 미국 법인은 주식을 두 종류로 나눠 발행했다. 일반 투자자가 사는 클래스A는 한 주에 한 표를 갖는 평범한 주식이고, 창업자가 쥔 클래스B는 한 주에 스물아홉 표를 갖는다. 그 결과가 이렇다. 창업자가 가진 보통주 지분은 8.8퍼센트에 불과한데, 의결권으로 따지면 73~74퍼센트에 달한다. 계산해 보면 1.73퍼센트의 지분만 있어도 과반 의결권을 쥘 수 있는 구조다.
이 숫자를 다시 읽어 주기 바란다. 회사의 8.8퍼센트를 소유한 사람이, 회사의 74퍼센트를 결정한다.
비례의 약속이 여기서 끊어진다. 잃을 것은 8.8퍼센트인데 휘두를 것은 74퍼센트라면, 권한과 책임은 더 이상 같은 곳을 향하지 않는다. 더 많이 잃을 사람이 더 크게 말한다던 약속은, 적게 걸고도 전부를 결정하는 사람 앞에서 무너진다. 이것이 첫 번째 어긋남이다.
오해를 막기 위해 덧붙이면, 차등의결권 자체가 불법인 것은 아니다. 미국과 영국과 일본은 이를 허용하고, 한국도 2023년 벤처기업법을 고쳐 비상장 벤처 창업자에 한해 한 주에 최대 열 표까지를 제한적으로 열어 두었다. 거액의 투자를 받다 보면 창업자의 지분이 자꾸 희석되니, 회사를 키운 사람이 경영의 키를 놓치지 않도록 받쳐 주자는 취지다. 명분이 없는 제도는 아니다.
다만 한국 증시에서는 한 주에 스물아홉 표 같은 주식을 발행할 수 없다. 1주 1의결권이 강행규정으로 버티고 있어서다. 그러니 이 구조는 한국이 아니라 그것이 허용되는 땅에 회사의 머리를 두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도구를 쓴 게 아니라, 도구가 허용되는 곳을 골라 간 것이다.
"주주를 위해서"라는 말
권한이 책임에서 떨어져 나오면, 그 떨어짐을 덮을 명분이 필요해진다. 그 명분의 이름이 주주 이익의 극대화다.
논리는 그럴듯하다. 창업자에게 흔들리지 않는 권한을 몰아주어야, 분기 실적에 일희일비하는 시장의 단기 압력에 휘둘리지 않고 길게 보고 회사를 키울 수 있으며, 그것이 결국 주주 모두에게 이롭다는 것이다. 한 사람에게 권력을 몰아주는 일이 모두를 위한 일로 포장되는 순간이다.
그러나 명분의 이름으로 불린 그 주주가 정작 누구인지를 물어야 한다. 차등의결권 아래에서 일반 주주, 곧 클래스A를 쥔 보통의 투자자들은 회사가 손실을 내도 경영진을 견제할 길이 없다. 표의 73퍼센트를 한 사람이 쥐고 있으니, 나머지가 아무리 모여도 그를 끌어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은 쿠팡 사태를 두고, 일반 주주의 재무적 손실과 고객의 피해는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차등의결권을 통해 경영자 한 사람을 보호하려는 구조라고 짚었다. 경영진을 견제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지배구조라는 것이다.
여기서 두 번째 어긋남이 드러난다. 주주를 위한다는 명분이 보호하는 것은 권한을 다 쥔 한 사람이고, 그 명분의 이름으로 호명된 일반 주주는 정작 손실 앞에서 입을 닫아야 한다. 명분과 그 수혜자가 어긋나 있다. 모두를 위한다는 말이, 실은 한 사람을 위한 말이었던 것이다.
권한은 모이고 책임은 흩어진다
이제 두 개의 어긋남이 합쳐지는 지점을 보자. 권한은 한 사람에게 모이는데, 책임은 어디로 가는가.
권한이 모이는 곳은 분명하다. 8.8퍼센트로 74퍼센트를 쥔 사람, 그가 이사회 의장까지 겸하는 자리다. 그런데 책임을 물으려는 순간, 그 사람은 도무지 한자리에 붙잡히지 않는다. 책임을 묻는 국회가 불렀을 때 실권을 쥔 사람은 국경 밖에 있었고, 추궁의 자리에는 그에게 지시할 권한이 없는 대리인만 앉아 있었다. 권한을 가진 자는 부름 밖에 있고, 부름 안에는 권한 없는 자만 남는다.
책임을 묻는 또 다른 길도 미리 막혀 있다. 회사의 머리가 자리한 미국에는 경영판단의 원칙이라는 법리가 있어서, 이사가 선의로 충분히 살펴 내린 판단이라면 그 결과로 회사가 손해를 입어도 개인에게는 책임을 거의 묻지 않는다. 이 추정은 좀처럼 깨지지 않아서, 미국 법원은 시티그룹이나 골드만삭스 같은 사건에서도 사업상 위험에 대한 이사의 감독 책임을 원칙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권한은 끝까지 행사하되 잘못된 결과의 책임은 비켜 가는 길이, 법리의 이름으로 닦여 있는 셈이다.
그리하여 그림이 완성된다. 권한은 국경 밖 한 사람에게 모이고, 책임은 법인이라는 구조 속으로, 대리인의 자리로, 경영판단이라는 법리 속으로 잘게 흩어진다. 소유와 책임의 분리가 완성되는 것이다.
추리의 매듭은 여기서 지어진다. 주식회사는 본디 위험을 잘게 나눠 여럿이 나눠 지라고 만든 물건이었다. 그런데 차등의결권으로 권한을 한 곳에 몰고, 주주 이익이라는 명분으로 그 쏠림을 덮고, 책임을 가장 묽게 만드는 땅에 머리를 두면, 책임을 나누라고 만든 그 장치는 책임을 떼어내는 장치로 뒤집힌다. 같은 칼의 양날이다. 위험을 나눠 지게 하던 칼이, 책임을 떼어내는 데 쓰인다.
한 사람에게 책임을 도로 묶는 일
그래서 한국에는 세계에 유례없는 제도가 하나 있다. 동일인 지정이다.
공정거래위원회는 매년 거대 기업집단을 지정하면서, 그 집단을 사실상 지배하는 한 사람을 동일인, 곧 총수로 지목한다. 그 사람의 이름으로 친족과 계열사의 범위가 정해지고, 사익 편취 같은 규제의 책임이 그에게 모인다. 흩어지려는 책임을 도로 한 사람에게 묶어 두려는 안간힘이다. 1987년에 재벌이라는 한국 특유의 지배구조를 겨냥해 만든 제도이니, 다른 나라에는 굳이 있을 까닭이 없다.
쿠팡은 오랫동안 이 묶음을 비켜 갔다. 창업자가 미국 국적이라는 점, 회사의 머리가 미국 법인이라는 점을 들어 2021년 이래 사람이 아니라 법인이 동일인으로 지정되어 왔기 때문이다. 권한은 사람이 쥐는데 책임의 이름은 법인이 진다는, 바로 그 분리가 제도의 표면에까지 그대로 새겨져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2026년 4월 29일, 공정위는 쿠팡의 동일인을 법인에서 창업자 개인으로 바꿔 지정했다. 흩어져 있던 책임을 마침내 한 사람에게 도로 묶은 것이다. 그러자 회사는 곧바로, 5월 8일에 그 지정을 취소해 달라는 행정소송을 냈다.
이 마지막 장면을 오래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권한을 다 쥔 쪽이 책임의 이름표 하나를 거부하며 법정으로 향하는 그 모습이야말로, 이 글이 처음부터 따라온 명제를 스스로 증명하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권한은 가지되 책임은 지지 않겠다는 것. 소유와 책임의 분리는 어느 이론서의 개념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법정에서 다투어지고 있는 사건이다.
친구는 보편을 말하면 좋아요가 늘 거라고 했다. 옳은 말이다. 다만 보편을 말하려고 구체를 버리면, 칼은 자루만 남고 날을 잃는다. 그래서 나는 주식회사라는 보편의 자루에, 8.8퍼센트와 74퍼센트라는 구체의 날을 박아 두기로 했다. 무뎌지지 않기 위해서다.
다시 한번 말해 두지만, 주식회사에도 차등의결권에도 법인이라는 격에도 죄는 없다. 그것들은 위험을 나누고 회사를 키우라고 만들어진, 그 자체로는 더없이 영리한 도구다. 죄는 늘 용도에 있다. 책임을 나누라고 만든 장치가 책임을 지우는 데 쓰일 때, 권한만 거두고 책임은 흘려보내는 데 쓰일 때. 그때 도구는 비로소 흉기가 된다.
작은 입으로 다시 한번 묻는다. 권한을 전부 가진 사람이 책임만 한 조각도 지지 않겠다면,
그 회사의 주인은 대체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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