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그래밍/AI

풍경이 옮겨가는 중 — 견적의 문법 다음에 보이는 세 갈래

Tiboong 2026. 5. 13.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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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SI와 AI 시리즈 5편 4편 「견적의 문법」에 이어서


1. 끈질김의 정체를 묻기

4편에서 한국 SI가 "견적의 문법"이라는 한 가지 가격 언어 안에 갇혀 있다고 적었습니다. 이건 몇 개월에 얼마, 저건 몇 주에 얼마. 투입 시간만 거래되고, 결과물의 가치도 판단의 값도 거래되지 않는 언어. 4편의 핵심 문장은 이것이었습니다. "이건 개인의 사고방식이 아니라 관계를 지배하는 문법이기 때문입니다."

 

글을 발행한 뒤로 몇 가지 의문이 따라붙었습니다. 이 문법이 왜 이토록 끈질긴가. 그리고 다음으로, 빠져나오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30년 동안 발주자도, 대형 SI도, 중소 SI도, 끝단 개발자도 모두가 잘못된 견적 안에서 다쳐왔습니다. 모두가 다쳤는데 아무도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5편은 빠져나오는 길에 관한 글입니다. 다만 처방이 아니라 풍경의 관찰에 머물려 합니다. 누구에게 무엇을 하라고 권하는 일은 시리즈의 톤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다만 풍경이 어디로 옮겨가고 있는지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빠져나오는 길의 윤곽 정도는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2. 같은 결과물은 비슷한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가정

견적의 문법은 시간으로 가격을 매기는 언어입니다. 사람 한 명이 한 달 일하면 얼마, 두 달 일하면 얼마. 30년 동안 이 언어가 작동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한 가지 묵시적 전제가 있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같은 결과물은 비슷한 시간을 필요로 한다.

 

이 가정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묘합니다. 같은 등급의 개발자가 같은 일을 비슷한 시간에 한다고 가정하는 순간, 잘하는 사람의 가치는 천장에 막힙니다. 8시간 걸릴 일을 2시간에 끝내면 견적의 문법 안에서는 "노는 사람"이 됩니다. 6시간 야근해야 비로소 "일하는 사람"으로 인정받습니다. 시간이 노동의 단위인 사회에서, 효율은 보상이 아니라 의심의 대상이 됩니다.

 

이 구조 안에서 잘하는 사람은 천천히 떠나거나, 떠나지 않은 채로 평균에 자기 페이스를 맞춥니다. 빨리 끝낼 수 있어도 일주일까지 끌어주는 게 한국 SI 현장의 암묵적 매너였습니다. 슈퍼 개발자가 2일 만에 끝냈을 때 "왜 너만 빨리 끝내냐, 일을 대충 한 거 아니냐"고 의심받지 않으려면, 다 같이 일주일 걸리는 게 모두에게 안전한 합의였습니다. 출근해서 커피, 담배, 한 시간 일, 점심, 게임 한판, 두 시간 일, 저녁, 야근이라고 앉아서 노는 — 이 패턴의 반복이 가능했던 이유가 여기 있는 것 같습니다.

 

평준화는 발주자의 무지에 대한 자기 보호 장치였던 것 같습니다. 발주자는 IT를 모르고, 결과물 품질을 직접 평가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품질의 대리지표가 되었습니다. 오래 걸린 일이 공들인 일이고 믿을 만한 일이라는 학습. 그러나 이 학습 위에서는 슈퍼 개발자도 평범한 개발자도 같은 등급으로 묶입니다. 알아볼 능력이 없는 발주자에게 변별을 기대할 수 없으니, 시장 전체가 평균에 수렴하는 자리로 갔습니다.


3. 그 가정이 무너지는 자리

바이브 코딩 시대의 가장 큰 변화는 정확히 그 가정을 무너뜨리는 일입니다. 같은 기능을 만드는 데 누구는 일주일이, 누구는 한 달이 걸립니다. 누구는 혼자서, 누구는 셋이서. 이 차이는 등급이나 경력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고객의 요구사항을 얼마나 정확히 이해했는가, AI에게 얼마나 정확하게 전달했는가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렇다면 시간으로 가격을 매기는 일이 우스워집니다. 같은 결과물을 일주일에 만든 사람과 한 달에 만든 사람이 받는 돈이 정반대가 되는 구조 — 일주일 만에 만든 사람이 더 적게 받는 — 가 견적의 문법 안에서는 자연스럽지만, 새 시대에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됩니다.

 

다만 이 가정의 붕괴가 곧바로 시장의 변화로 이어지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발주자가 이 변화를 받아들이려면, 결과물을 직접 평가할 능력을 새로 학습해야 합니다. 시간이 더 이상 품질의 대리지표가 못 되니까요. 그러나 30년 동안 시간으로 측정하는 데 익숙해진 발주자가 어느 날 결과로 평가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단기적으로 보이는 풍경은 변화가 아니라 혼란에 가깝습니다.

 

발주처는 AI를 이유로 단가를 깎습니다. 그런데 그 인하의 근거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AI가 만들어준 거잖아 깎자, 정도의 직관적 반응. 이 반응은 사실 "내가 이 결과물을 평가할 줄 모르겠으니 시간으로 환산해서 깎자"는 방어 행동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평가 능력이 없는 자리에서 협상력만 사용되는 풍경. 그 협상력의 충격은 견적의 문법 안에서 가장 약한 자리로 흐릅니다.


4. 압박이 흐르는 방향

발주처에서 시작된 압박이 SI 시장 안에서 어디로 흐르는지를 보면, 한 가지 구조가 보입니다.

 

영리한 대형 SI는 이미 오래전부터 컴퓨터공학을 포함한 공대 출신을 잘 뽑지 않았습니다. 말 잘하는 상경계열을 뽑아 한 달쯤 개발 용어를 가르쳐 발주처 응대를 맡깁니다. 개발은 하청에서 할 테니 자기 회사 직원은 통역만 하면 된다는 분업입니다. 이 직원들이 발주처 미팅에서 약속을 받아오고, 그 약속을 하청 라인에 던집니다. 하청은 재하청으로, 재하청은 재재하청으로 약속을 떠넘깁니다. 단가는 단계마다 절반 가까이 깎이고, 압박은 단계마다 두 배씩 무거워집니다. 발주처가 인정한 가치의 3분의 1만 실제 만드는 사람에게 도달하고, 나머지는 중개 비용으로 사라지는 구조.

 

발주처가 단가를 깎으면 어떻게 될까요. 원청은 "그래 깎자" 하고 받아서 하청에 그대로 내려보냅니다. 자기 마진은 안 깎습니다. 하청은 다시 재하청에게, 재하청은 끝단 개발자에게. 결과적으로 발주처가 10% 깎으면 끝단 개발자는 30% 깎입니다. 중간 마진은 비례적으로 안 깎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AI 시대에 표면적으로 흔들리는 사람이 끝단 개발자로 보이는 이유입니다. 단가가 깎이는 자리가 끝단이니까요. 그런데 그 인하 압박의 진짜 출처는 발주처가 AI 보고 느낀 의심이고, 그 의심이 정조준한 것은 사실 중간의 마진 정당성입니다.

 

발주처가 ChatGPT에게 "이런 시스템 만들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으면 답이 나옵니다. RFP 초안도 AI가 써줍니다. "이 견적이 합리적이냐"도 AI에게 물으면 비교 분석해줍니다. 그동안 중간 상인들이 마진을 정당화하던 능력 — 통역, 응대, 견적 작성, 일정 관리, 품질 평가 — 이 모든 것이 AI 한 줄로 우회되기 시작했습니다. 한 달 교육받은 응대 직원의 통역 가치가 AI에 의해 대체되는 풍경.

 

다만 그 결과가 응대 직원의 단가가 깎이는 쪽이 아니라, 하청 라인 끝의 개발자 단가가 더 깎이는 쪽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압박은 여전히 아래로 흐릅니다. 마치 떠나기 전 마지막 추수의 풍경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5. 양쪽이 다 자기 자리에서 합리적이었다

다만 이 풍경을 한쪽의 잘못으로 정리하는 일은 정확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영업과 관리를 맡았던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이고 그 일의 시장 가격을 받은 것입니다. 발주처를 따오는 능력, 프로젝트를 관리하는 능력, 발주처와 개발자 사이를 통역하는 능력 — 이 모두가 시장에서 가격이 매겨지는 능력입니다. 자본주의 시장에서 그 능력의 가격이 마진으로 환산되는 일은 자연스럽습니다.

 

개발자가 그 자리로 가지 않은 것 또한 사실인 것 같습니다. 비즈니스 언어로 건너가지 않은 것, 발주처와 직접 대화하지 않은 것, 컨설턴트와 소통하기보다 기술 언어 안에 안전하게 머문 것, 자기 가치를 자기가 정하는 자리로 옮겨가지 않은 것. 이 모두가 개발자 자신의 선택이었습니다. "그건 비즈니스 사이드가 알아서 해야지"의 회피가 30년 누적된 결과가 지금 풍경의 한 부분입니다.

 

다만 이 합리성이 작동한 시장 자체가 한쪽에게 협상력을 주지 않는 구조였다는 점도 사실인 것 같습니다. 공급 과잉이라 줄을 서야 했고, 평준화로 변별이 안 됐고, 자기 가치를 직접 증명할 수단도 없었습니다. 합의의 형식을 가진 일방성. 그것이 30년이었습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누구의 승리도 아닙니다. 그저 합의의 외피를 쓴 권력 비대칭이 30년 누적된 풍경입니다. 30년이 지나서야 이 비대칭의 형태가 이렇게 또렷해지는 것 같습니다.


6. 시장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중

지금 한국 SI 시장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중인 것 같습니다.

 

 

큰 발주처 시장은 한동안 견적의 문법이 더 작동할 것 같습니다. 대기업과 공공기관의 본격 IT 사업, 100억과 500억과 1000억짜리 입찰. 여기는 법인 자격이 필수이고, 보안과 컴플라이언스와 책임 소재가 사람을 통해 책임져야 하는 영역입니다. 그래서 법인을 통한 도급 구조 자체는 유지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만 그 자리를 누가 차지하느냐가 바뀌는 중입니다. 글로벌 SaaS가 점점 더 많은 자리를 가져가고, 발주처 내재화가 핵심 시스템을 가져가고, 남은 SI 일거리는 줄어들면서 단가는 깎입니다. 한국 SI에게 이 시장은 점점 좁아지는 시장입니다.

 

작은 발주처 시장은 다른 풍경입니다. 그동안 비싼 개발비 때문에 자기 시스템을 가져보지 못했던 작은 곳들 — 동네 병원, 1인 사업자, 작은 협회, 자영업자, 중소기업의 사이드 부서들 — 에서 새로 열리는 자리. AI가 개발 비용의 본질을 낮추면서, 그동안 1억으로도 못 만들던 시스템이 1500만 원에 가능해지면, 그 가격을 쓸 의사가 있는 발주처는 기존의 100배 가까이 늘어납니다. 시장의 총량이 줄어드는 게 아니라 다른 곳으로 옮겨가면서 늘어나는 풍경.

 

이 새 시장은 큰 시장과 성격이 완전히 다릅니다. 발주자가 자기 업무는 잘 알지만 IT는 잘 모릅니다. 큰 입찰을 진행할 인력도 없습니다. RFP 같은 문서를 작성할 줄도 모릅니다. 그래서 함께 진단하고, 작게 시작하고, 결과로 거래하는 형태가 자연스럽습니다. 영미 시장의 네 가지 가격 언어 — 시간·재료 + 천장, 단계 분리, 월 정액 자문, 성과 기반 — 이 정확히 이런 관계를 위해 설계된 언어들입니다. 한국 큰 발주처 시장에는 끝내 들어오지 못한 이 언어들이, 작은 발주처 시장에는 처음부터 자연스럽게 작동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7. 그러나 두 시장 사이에 다리가 없다

다만 한 가지 어려움이 있습니다. 두 시장이 거의 분리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큰 발주처는 법인하고만 거래합니다. 사업자등록증, 법인등기부, 4대 보험 가입 증명, 신용평가 — 이런 서류 게이트를 통과해야 합니다. 핵개인이나 1인 사업자는 이 게이트를 못 넘습니다. 그래서 작은 시장에서 평판을 쌓은 핵개인이 큰 시장으로 진입할 길이 거의 없습니다.

 

반대로 큰 시장의 SI 회사들도 작은 시장으로 못 옵니다. 영업·관리 오버헤드가 커서 1500만 원짜리 시장에서는 마진이 안 나옵니다. retainer 모델은 회사 회계 구조와 충돌하고, 결과 기반 거래는 대형 조직의 위험 회피 문화와 잘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SI 회사가 작은 시장으로 옮겨가는 일도 사실상 어렵습니다.

 

가운데에 다리를 놓는 자리 — 법인이지만 작고, 작지만 평판이 있어 큰 발주처도 받을 수 있는 자리 — 가 한국에는 거의 없습니다. 영미 시장의 부티크 컨설팅·소프트웨어 하우스가 이 자리에 있지만, 한국에는 자라지 못한 자리입니다. 한국 시장 구조가 대형 SI 아니면 1인 프리랜서의 양극단으로 갈라져 있어서, 중간 자리가 자라날 토양이 없었습니다.

 

AI 시대에 이 자리가 처음 가능해질 수도 있습니다. 3~5명짜리 법인이 AI를 활용해 예전 30명짜리 법인이 했던 일을 처리하는 시대가 오면, 양극단 사이의 중간 자리가 한국에 처음 만들어질 수도 있습니다. 다만 그 자리가 정말로 만들어질지, 만들어진다면 누가 채울지는 —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8. 한국 바깥에 있을지도 모르는 길

여기서 한 가지 다른 풍경이 보입니다.

 

한국 SI 안에서 빠져나가는 길을 찾으려는 시도가 30년 동안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점은, 어쩌면 그 길이 한국 바깥에 있었음을 의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인도가 30년 전에 갔던 길이 그것입니다.

 

인도는 국내 시장이 척박했지만 영어와 글로벌 발주처라는 자산으로 IT 서비스 산업을 키웠습니다. TCS, Infosys, Wipro가 그 결과입니다. 처음에는 단순 외주(시간당 인건비 차익)로 시작했지만, 30년 동안 자기 가격 언어를 만들어냈습니다. 인도 SI는 한국 SI가 못 본 자리에서 30년을 보냈습니다.

 

한국이 그 길을 가지 못한 이유는 한국의 국내 시장이 충분히 풍요로웠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삼성, LG, 금융권, 공공의 대규모 IT 사업이 끊임없이 발주되었고, 한국 SI들은 국내 시장에서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었습니다. 글로벌로 나갈 동기가 없었습니다. 인도는 어쩔 수 없이 나갔는데, 한국은 풍요로워서 안 나갔습니다. 풍요가 함정이 된 자리.

 

지금 그 풍요가 끝나가고 있습니다. 견적의 문법은 단가 압박을 만들고, AI는 SI 일거리를 갉아먹고, 발주처 내재화와 글로벌 SaaS는 큰 시장을 잠식합니다. 한국 SI에게 국내 시장은 줄어드는 시장입니다. 30년 동안 안 나갔던 이유가 사라지고 있는 중입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AI가 언어 장벽을 낮추는 중입니다. 10년 전이라면 글로벌 발주처와 직접 협상하려면 영어 능력이 필수였습니다. 지금은 ChatGPT, DeepL 같은 도구로 이메일 협상은 거의 무리 없이 가능합니다. 화상 미팅 실시간 통역도 빠르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자기 영어 실력 때문에 글로벌 시장 못 가던 시대가 빠르게 끝나는 중인 것 같습니다.

 

다만 모두가 갈 수 있는 길은 아닙니다. 글로벌 시장에서 통용되려면 자기 분야의 글로벌 표준을 이해해야 하고, 자기 자격을 영문 자료로 증명할 수 있어야 하고, 글로벌 발주처 문화에 적응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국 공공 SI 표준 문서 작성 경력 같은 한국 안에서만 통용되는 자산은 글로벌에서 가치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도메인이 글로벌하게 통용되는 분야 — 게임, 오픈소스 기여, 특정 기술 스택의 깊이, 글로벌 산업 도메인 — 라면 가능성이 진짜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국 안에서 자기 자격을 만들어둔 사람일수록 글로벌 진출이 가깝습니다. 글, 결과물, 평판 — 이 자산은 번역만 하면 글로벌에서도 가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글로벌 시장은 한국 안에서 핵개인 자리에 도달한 사람의 다음 자리일 가능성이 큽니다.


9. 글을 닫으며

견적의 문법은 한 산업의 30년이 만든 두꺼운 언어입니다. 한 사람이 단번에 무너뜨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옆에서 풍경이 옮겨가는 중인 것 같습니다.

 

큰 발주처 시장은 좁아지는 중이고, 작은 발주처 시장은 다른 언어로 새로 열리는 중이고, 두 시장 사이의 다리는 한국에 거의 없는 채로 남아 있고, 한국 바깥에는 30년 전에 인도가 갔던 길이 여전히 열려 있습니다. AI가 어느 한 시장만 흔든 것이 아니라, 이 모든 풍경의 균형을 동시에 흔들고 있는 중인 것 같습니다.

 

흔들고 있다고 해서 자동으로 새 균형이 잡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흔들리고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30년 동안 견고했던 풍경에 처음으로 균열이 보이고 있습니다. 그 균열이 누구에게 기회가 될지, 누구에게 가혹함이 될지는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정직하게 짚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견적의 문법 안에서 묵묵히 일하며 누군가가 자기 가치를 알아봐주기를 기다렸던 사람들이, 어리석었던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1990년대와 2000년대와 2010년대까지 그 기다림은 한국 SI 시장에서 합리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성실하게 일하면 언젠가 인정받는다는 약속이 — 비록 자주 깨졌더라도 — 시장의 공식 규칙이었고, 그 규칙 안에서 코드를 잘 짜는 능력은 인정의 단위로 작동했습니다. 적어도 동료들끼리는 누가 더 잘 짜는지를 알아봤습니다. 시장의 인정이 늦더라도, 동료의 인정은 있었습니다.

 

지금 그 단위 자체가 바뀌는 중인 것 같습니다. 코드를 잘 짜는 능력이 더 이상 인정의 단위가 아니라, AI를 통해 더 좋은 소프트웨어를 만들 수 있는가, 결과물의 품질을 판단할 수 있는가가 새 단위가 되는 중입니다. 이 변화는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30년 동안 코드 잘 짜는 데 집중한 시니어에게는 잔인한 풍경입니다. 새 게임의 룰을 처음 배우는 사람과 같은 출발선에 서 있는데, 30년 동안 옛 게임에 투자한 시간이 무게로 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정확한 표현은 이런 것 같습니다. 인정받기를 기다린 일이 어리석었던 것이 아니라, 인정받을 기회 자체가 사라지는 중인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다른 일입니다. 그리고 후자의 자리에 서 있는 사람에게 "자기 증명으로 가세요"라고 말하는 일은 — 그 자리의 무게를 잘 모르는 사람만이 쉽게 할 수 있는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음 자리는 자기 가치를 자기가 증명하는 자리인 것 같습니다. 글로, 결과물로, 직접 거래로, 공개된 사고의 흐름으로. 그 자리는 한국 안에 작게 있고, 한국 바깥에 더 넓게 있는 것 같습니다. 다만 모든 사람이 이 자리로 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30년 동안 옛 게임에 투자한 시간의 무게는 진짜 무겁고, 그 무게를 가벼이 여기는 위로는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누구도 대신 걸어줄 수 없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누구나 같은 보폭으로 걸을 수 있는 길도 아닌 것 같습니다.

 

필자도 그 자리를 향해 한 발씩 옮기는 한 사람으로서 이 글을 씁니다. 같은 자리에서 무게를 느끼고 계신 분들께, 이 글이 적어도 그 무게를 외면하지 않는 한 페이지가 되기를 바라며.


— 시리즈 5편. 4편 「견적의 문법」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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